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카본블랙 사무소에서 만난 문태연 카본블랙 대표와 카본블랙이 공동 창업한 회사 카본식스가 이달 출시한 '시그마 키트' /장경식 기자


“오픈AI나 구글조차도 접근하기 어려운 실물 데이터가 있습니다. 산업 전반에 숨어 있는 현장의 데이터에 인공지능(AI)을 입혀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카본블랙 사무실에서 만난 문태연 카본블랙 대표는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대표는 2019년 미국 나스닥 상장사 코그넥스가 2억달러(약 2800억원)에 인수해, 당시 국내 테크 스타트업 중 최대 매각 규모로 주목받았던 ‘수아랩’의 공동 창업자다. 수아랩은 AI 초창기, 당시 지하철 8호선 연장 는 흔치 않았던 피지컬 AI 분야에서 AI 기반 머신 비전(Machine Vision) 솔루션을 개발했다. 그런 문 대표가 작년 5년 만에 새로 세운 회사가 카본블랙이다. 수아랩 매각 후 문 대표가 언론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조 현장의 ‘디지털 희토류’
일반인에게 익숙한 AI인 챗GPT, 퍼플렉시티 같은 현대스위스상호저축은행 거대언어모델(LLM)은 온라인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이들이 닿을 수 없는 데이터 층위가 있다. 바로 산업 현장 속 실물 데이터다. 문 대표는 “인터넷에서 정보 접근 자체가 어렵고, 여러 제조업 현장에 각기 다른 형태의 데이터들이 분산돼 숨겨져 있다. 피지컬 인더스트리(실물 산업)가 전체 산업 GDP의 70~75%를 차지하는 것 코리아써키트 을 감안하면, AI를 적용했을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가 크다”고 했다.
문 대표는 이런 데이터를 ‘디지털 희토류’라고 표현했다. 희토류가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인 것처럼, 제조 현장의 데이터는 AI 산업의 핵심 자원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한국을 찾은 스펜서 황 엔비디아 로보틱스 총괄도 한 매체 인터뷰에서 바로 이 점을 언급하며, 급여압류절차 제조업 공장이 수직 계열화된 한국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라고 꼽았다.
문 대표가 창업한 카본블랙은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 모델’을 택했다. 내부에서 직접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초기 자본, 인력, 시스템을 투입해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고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설립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 특징 처캐피털(VC)과 달리 능동적인 창업자 겸 투자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카본블랙 사무소에서 문태연 카본블랙 대표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장경식 기자


문 대표는 “피지컬 AI 영역에는 아직 누구도 선점하지 못한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 많다”고 했다. 미국에선 이미 이런 벤처 스튜디오(venture studio) 모델이 발달했다. 제약 분야 컴퍼니 빌더인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은 20여 년간 100개가 넘는 회사를 만들어 2023년 기준 30개 회사를 상장시켰고, 코로나 백신으로 유명한 모더나도 이렇게 탄생했다.
◇‘생각하는 로봇’
작년 9월 카본블랙이 처음으로 출범시킨 회사가 제조업에 특화된 피지컬 AI를 개발하는 ‘카본식스’다. 문 대표가 직접 미국, 일본 등에 날아가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와 예일대의 연구진인 김제혁 공동대표, 서형주 CTO를 섭외했다. 카본식스는 예측하기 어렵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제조 공정에도 로봇 자동화를 도입하는 걸 목표로 한다. 지난달 18일 첫 제품으로 ‘시그마 키트’를 출시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결합한 로봇으로, 인간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AI 기술인 로봇 AI 모방 학습을 기반으로 했다. 또 어느 분야에서든 활용하기 쉽게 완제품이 아닌 툴킷(표준품)을 택했다.
시그마 키트는 티칭 툴(teaching tool·훈련 도구)을 통해 한 동작당 100번 정도를 입력한다. 보통 한 시간이면 모든 동작을 입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입력한 데이터를 하루 정도 학습하면 바로 다음 날 공정에 도입할 수 있다. 기존에는 자동화 로봇을 도입하기 위해 전문가가 현장에 1~2주가량 파견돼 수동으로 코딩을 짜고 현장 상황에 맞게 조율해야 했다. 시그마 키트를 활용하면 AI 전문 지식이 없어도 바로 활용할 수 있다.
시그마 키트는 AI 학습을 통해 여러 변수에 사람처럼 유연하게 대응한다. 실제 로봇이 물에 젖은 얇은 필름을 떼는 동작을 시연했는데, 한 번에 떼지지 않자 스스로 판단해 한 번 더 필름을 벗겨냈다. 매번 형태나 상황이 다른 비정형 공정에 도입하기 유리한 것으로, 단순 동작을 반복하는 자동화 로봇과 차별성을 갖는다.
카본 식스는 해외 VC에서 400만달러(약 57억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고, 미국 델라웨어에 본사를 설립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을 목표로 한 것이다. 문 대표는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에 제조 공장이 밀집해 있고, 한국은 접근성이 높다”며 “여기서 빠르게 검증하고 데이터를 쌓은 뒤, 제조 공장을 다시 본국으로 불러 모으는 미국으로 시장을 확장할 계획이다. 이런 점을 미국 VC들도 높게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국제로봇연맹(IFR)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로봇 밀도는 제조업 노동자 1만명당 1012대로 유일하게 1000대를 넘기며 압도적 1위다. 자동화 솔루션 도입에 적극적인 고객사가 많다는 의미다.
◇쓸수록 똑똑해지는 AI
시그마 키트는 카본블랙이 추구하는 ‘피지컬 AI’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을 보여준다. 적은 데이터로도 산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 이용자는 자동화 효과를 바로 체감한다. 보급이 쉬워 이용이 늘어나면 회사는 더 많은 실물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거대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을 가장 빠르게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물 데이터는 인터넷에서 수집할 수 없기 때문에, 초기 단계부터 거대한 데이터망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문 대표는 “데이터를 모으면서도 즉각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 플라이휠(Data Flywheel)’ 구조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테슬라가 전기차를 판매하면서 고객의 주행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율 주행 네트워크를 구축해온 것과 같다. 고객이 빠르게 효용을 체감할 수 있는 제품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를 모아 더 고도화된 AI 모델을 내놓는 선순환 구조다.
사명인 카본블랙은 타이어를 검게 만드는 핵심 물질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문 대표는 산업 현장에 관심이 높았다고 했다. 대학생 때 신흥시장이었던 아시아 제조 공장의 현장들을 직접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 200~300곳에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전거 타이어 공장에서 6개월간 일할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타이어의 원재료가 되는 고무를 수입하는 파푸아뉴기니 고무 농장에서 시작해 타이어의 제조 현장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콧구멍에서 까만 물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과 선배였던 송기영 대표와 함께 수아랩을 공동 창업했다. 당시 제조업 비전 검사라는 특정 영역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현장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본블랙의 포트폴리오에는 카본식스 외에도 AI 에이전트 기반 CAD(컴퓨터 지원 설계·Computer-Aided Design) 설계 및 해석 자동화 업체인 ‘메카니컬에이아이’, AI 기반 공급망 관리 효율화 업체인 ‘업그레이드 매뉴팩처링’이 있다. 이 외 다른 분야에서도 창업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