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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no1reelsite.com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이번 기회에 자수하게."
남이지서 순경은 석곡리 박제순의 집을 찾아가 주인장에게 점잖게 권고했다. 박제순은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경찰이 자수를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권고인지 강요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자신의 과거 이력을 남이지서에서 확인한 이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애청 청원군 남이면 북부 책임자 박제순은 지서에 자수하고 전향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강요된 자수와 전향의 그림자
자수서에는 과거 행 사이다쿨접속방법 적을 낱낱이 기록해야 했다. 일시가 불분명하거나 상황이 애매하면 호통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말이 '자수'지, 실제 분위기는 검거되어 취조를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전향서에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안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온라인릴게임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정부와 다른 이념·사상을 가진 단체나 개인에게 '빨갱이'라는 옥쇄를 채웠다. 심지어 야당 정치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국가보안법에 따라 남로당, 민애청, 농민회 등 좌익 단체 구성원에게 강제적으로 자수를 요구했다.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전국적으로 총 37일간 자수주간이 진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행되었다.
1949년 11월 27일 기준 자수자는 서울 1만 2196명, 경기도 5964명, 제주도 5283명, 강원도 4978명, 충북 3512명, 경북 1938명, 충남 1054명이었다. 여기에 경남 2143명, 전북 1660명, 전남 1150명, 철도(종사자) 143명을 포함하면 전국 총계는 3만 9986명에 이른다.
바다이야기룰 제주도의 수치가 서울과 경기에 이어 높게 나타난 것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전국적인 자수자 규모를 당시 좌익 세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충북 지역은 11월 23일 기준으로 진천 1627명, 제천 269명, 청주(청원) 192명, 보은 158명, 옥천 69명, 영동 67명, 음성 16명, 단양 7명, 괴산 7명, 충주 6명 등 총 2418명이었다. 즉, 충북의 자수자는 단 4일만에 1094명이나 증가했다. 이는 순수한 의미의 자수라고 볼 수 없다(<동아일보> 1949년 11월 25일, 12월 2일자).
자수 주간이 종료된 후, 검경 당국은 자수하지 않은 좌익 계열을 색출하기 위해 경찰서 사찰과 요원, 우익단체원을 읍·면에 순회 파견하며 추가 포섭 활동을 벌였다.
국민보도연맹의 그림자
▲ 증언자 김기반 강내면 보도연맹 운영현황을 증언한 김기반
ⓒ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지역 좌익 핵심 활동가였던 신형식은 자수 주간 동안 충북 도내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수를 독려했다. 김기반(192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신형식은 말을 타고 강내면을 돌며 국민보도연맹 가입을 강권했다.
이승만 정부는 검경을 동원해 자수 기간을 설정하고, 좌익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수와 전향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국민보도연맹이 창설되었다. 원래 취지는 좌익 활동 경험이 있는 이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색출에 몰입했다. 충북 지역 국민보도연맹 간부 대부분은 신형식을 제외하고 경찰 출신이나 우익 단체 간부였다. 그러나 신형식의 위세는 대단했다. 김기반의 증언이다.
"충북보도연맹 간사장을 지낸 이가 신형식으로부터 경찰서장 대우를 받았슈. 도지사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 신형식이 거리를 활보할 때는 경찰 2~3명이 호위를 했슈. 신형식이 청주에서 강연도 했는디, 나도 2번 정도 참여했고 사무실도 가 봤지."
김기반이 언급한 신형식의 호위 경찰은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당시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였던 김동수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동수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은 청주지방 검사장이 총 관리·감독했으며, 전·현직 경찰과 검찰청 직원들이 보도연맹 사무실을 수시로 출입했다. 신형식의 경호는 3명이 맡았는데, 모두 경찰 출신이었다.
영운동 출신의 김〇섭은 청주경찰서 수사과 형사 출신으로 검도가 5단이었다. 그는 경찰 퇴직 후 검찰에 근무했으며, 이종〇는 사찰과 주임 출신이다. 이외에도 윤〇〇이 있었다.
국민보도연맹 창설 후, 충북도경찰국은 도내를 순회하며 반공 웅변대회를 열었다. 1946년 경찰에 임용되어 청주경찰서 사찰과와 충북도경 대공과에 근무한 신수인(1924년생)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반공영화를 마을별로 순회하며 상연을 했는데, 이때 반공연설을 같이 했어. 영화 상영 주관은 도청 공보과에서 했고, 도경 사찰과에서 적극 지원했지. 상영은 학교운동장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고, 거의 모든 마을에서 상영을 했어. 상영 직전에 대략 20분간 반공연설이 이루어졌는데 반공연설회 주관은 사찰과에서 맡았지."
신수인 역시 영화 상영 직전에 반공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자로 나선 이유는 1949년 충청북도 경찰국 주관 반공 웅변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충북보도연맹의 간부진과 활동, 신형식의 행적을 살펴보면, 국민보도연맹은 순수한 민간단체가 아니라 정부 주도의 반공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관리 또한 검찰과 경찰이 담당했음이 분명하다.
강요된 자수와 전향으로 충북보도연맹에 가입한 인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2002년부터 충북 지역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43곳에서 4386명, 소집 후 풀려난 인원은 16곳에서 1073명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이 아예 소집되지 않은 지역도 있다. 청원군 낭성면이 그런 경우다. 이를 종합하면 충북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은 약 6000~7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전,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은 약 30만 명에 달했다. 이를 고려하면 충북 지역 추정 인원 6000~7000명은 과장된 수치가 아니다. 충북을 비롯한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사실상 국민이 아니라 '비국민(非國民)'으로 분류되었으며, 정부가 약속한 '같은 국민으로 보호한다'는 말은 사실상 구호에 불과했다.
폭풍전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과 1949년 국민보도연맹 창설은 대한민국의 반공 체제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계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2년 만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는데, 이는 1950년 5월 30일로 6.25 전쟁 발발 26일 전이었다. 임기는 4년이 보장된 상태였다. 이른바 '폭풍전야'에 치른 선거였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제헌 선거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후보자 수가 크게 늘었다. 제헌 선거에서는 청주와 청원 갑·을구에서 후보가 각각 6명, 4명, 5명으로, 평균 경쟁률은 5:1이었다. 하지만 2대 선거에서는 후보가 각각 15명, 10명, 11명으로 2.4배 증가했고, 청주는 경쟁률이 15:1이나 되었다. 많은 사람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우익 단체 간부이거나 지역 유지였다.
그런데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제헌의회 선거는 미군정기에 UN 감시 하에 이루어졌으나, 제2대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치러졌다. 그럼에도 UN 한국위원회는 시찰반을 구성해 각 지방에 파견하여 공명선거 여부를 조사했다. 조사 방식은 후보자 한 명 한 명을 직접 면접하는 방식이었다.
청주에서는 중앙공원 안에 위치한 유아원에 면접 장소를 설치하고, 입후보자 전원에게 면접을 요청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광 충북도지사가 현장에 오기도 했다. 첫 번째 면접자는 홍원길이었다.
"귀하의 소속정당은 어디입니까?""무소속입니다."
"선거에 관권이 개입해서 부자유스럽지는 않습니까?""자유스럽습니다."
면접 내용이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그러나 UN한국위원회가 단순히 공명선거 감시를 위해 면접을 실시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후보들의 이력과 사상까지 확인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청주에서는 주성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에서 합동연설회가 개최되었다. 후보당 연설 시간은 20분으로, 15명의 후보가 연설하면 총 5시간이 소요되었다. 여기에 선거관리위원장 인사말과 사회자 발언을 합하면 총 6시간이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각 후보 진영에서 동원한 시민이었기에, 연설이 끝나면 유권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후순위 후보들은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정견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홍원길과 이영근의 독특한 선거전
▲ 의병대장 한봉수 출판기념회(청주공회당)
ⓒ 홍원길
제헌의회 선거에 이어 두 번째 출마한 홍원길(1914년생)은 독특한 선거전을 펼쳤다. 그는 충북신보에 연재했던 <의병대장>을 출판해 선거 홍보에 활용했다. <의병대장>은 한봉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로 1950년 3월 15일 출판되었으며, 해방 후 충북에서 청주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충북신보> 정경(政經)부장 나훈은 무심천 벚꽃나무에 <의병대장> 광고문을 걸어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선거 도중 소설 주인공 한봉수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홍원길은 이를 다른 후보 진영에서 사주한 것으로 여겼다.
홍원길의 선거운동은 정책 중심이었다. '특권계급 타도', '책임정치 구현' 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발 빠르게 움직여 현수막은 준비했지만, 각 투표소장 100미터 밖에 세울 수 있는 입간판은 준비하지 못했다.
당시 가가호호 방문은 불법이었는데, 홍원길을 제외한 모든 후보들이 이를 진행했다. 이러한 홍원길의 특색 있는 선거운동 덕분에 그는 15명의 후보 중 당선자 민영복에 이어 차점 득표자로 기록되었다.
청주 후보 중 가장 이색적인 후보는 이영근(1918년생)이었다. 그는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의 비서 출신으로, 근로인민당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반하여 청주중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전신)에 들어갔다.
진보정당 출신인 그는 청원을구 제헌국회의원 이만근의 친동생으로, 이만근은 동생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하자 자신의 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영근은 형의 선거구인 청원을구를 포기하고 청주에서 출마했다.
조봉암은 비서 출신인 이영근의 찬조연설을 위해 청주로 내려왔으나, 당시 대한국민당으로 출마한 이명식이 같은 당적의 조봉암에게 항의해 찬조연설은 무위로 돌아갔다. 뒤늦게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영근은 합동연설회에서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 토론식 연설로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홍원길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이번 기회에 자수하게."
남이지서 순경은 석곡리 박제순의 집을 찾아가 주인장에게 점잖게 권고했다. 박제순은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경찰이 자수를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권고인지 강요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자신의 과거 이력을 남이지서에서 확인한 이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애청 청원군 남이면 북부 책임자 박제순은 지서에 자수하고 전향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강요된 자수와 전향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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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안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온라인릴게임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정부와 다른 이념·사상을 가진 단체나 개인에게 '빨갱이'라는 옥쇄를 채웠다. 심지어 야당 정치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국가보안법에 따라 남로당, 민애청, 농민회 등 좌익 단체 구성원에게 강제적으로 자수를 요구했다.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전국적으로 총 37일간 자수주간이 진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행되었다.
1949년 11월 27일 기준 자수자는 서울 1만 2196명, 경기도 5964명, 제주도 5283명, 강원도 4978명, 충북 3512명, 경북 1938명, 충남 1054명이었다. 여기에 경남 2143명, 전북 1660명, 전남 1150명, 철도(종사자) 143명을 포함하면 전국 총계는 3만 9986명에 이른다.
바다이야기룰 제주도의 수치가 서울과 경기에 이어 높게 나타난 것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전국적인 자수자 규모를 당시 좌익 세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충북 지역은 11월 23일 기준으로 진천 1627명, 제천 269명, 청주(청원) 192명, 보은 158명, 옥천 69명, 영동 67명, 음성 16명, 단양 7명, 괴산 7명, 충주 6명 등 총 2418명이었다. 즉, 충북의 자수자는 단 4일만에 1094명이나 증가했다. 이는 순수한 의미의 자수라고 볼 수 없다(<동아일보> 1949년 11월 25일, 12월 2일자).
자수 주간이 종료된 후, 검경 당국은 자수하지 않은 좌익 계열을 색출하기 위해 경찰서 사찰과 요원, 우익단체원을 읍·면에 순회 파견하며 추가 포섭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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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김기반 강내면 보도연맹 운영현황을 증언한 김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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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지역 좌익 핵심 활동가였던 신형식은 자수 주간 동안 충북 도내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수를 독려했다. 김기반(192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신형식은 말을 타고 강내면을 돌며 국민보도연맹 가입을 강권했다.
이승만 정부는 검경을 동원해 자수 기간을 설정하고, 좌익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수와 전향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국민보도연맹이 창설되었다. 원래 취지는 좌익 활동 경험이 있는 이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색출에 몰입했다. 충북 지역 국민보도연맹 간부 대부분은 신형식을 제외하고 경찰 출신이나 우익 단체 간부였다. 그러나 신형식의 위세는 대단했다. 김기반의 증언이다.
"충북보도연맹 간사장을 지낸 이가 신형식으로부터 경찰서장 대우를 받았슈. 도지사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 신형식이 거리를 활보할 때는 경찰 2~3명이 호위를 했슈. 신형식이 청주에서 강연도 했는디, 나도 2번 정도 참여했고 사무실도 가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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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은 청주지방 검사장이 총 관리·감독했으며, 전·현직 경찰과 검찰청 직원들이 보도연맹 사무실을 수시로 출입했다. 신형식의 경호는 3명이 맡았는데, 모두 경찰 출신이었다.
영운동 출신의 김〇섭은 청주경찰서 수사과 형사 출신으로 검도가 5단이었다. 그는 경찰 퇴직 후 검찰에 근무했으며, 이종〇는 사찰과 주임 출신이다. 이외에도 윤〇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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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인 역시 영화 상영 직전에 반공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자로 나선 이유는 1949년 충청북도 경찰국 주관 반공 웅변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충북보도연맹의 간부진과 활동, 신형식의 행적을 살펴보면, 국민보도연맹은 순수한 민간단체가 아니라 정부 주도의 반공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관리 또한 검찰과 경찰이 담당했음이 분명하다.
강요된 자수와 전향으로 충북보도연맹에 가입한 인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2002년부터 충북 지역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43곳에서 4386명, 소집 후 풀려난 인원은 16곳에서 1073명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이 아예 소집되지 않은 지역도 있다. 청원군 낭성면이 그런 경우다. 이를 종합하면 충북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은 약 6000~7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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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과 1949년 국민보도연맹 창설은 대한민국의 반공 체제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계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2년 만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는데, 이는 1950년 5월 30일로 6.25 전쟁 발발 26일 전이었다. 임기는 4년이 보장된 상태였다. 이른바 '폭풍전야'에 치른 선거였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제헌 선거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후보자 수가 크게 늘었다. 제헌 선거에서는 청주와 청원 갑·을구에서 후보가 각각 6명, 4명, 5명으로, 평균 경쟁률은 5:1이었다. 하지만 2대 선거에서는 후보가 각각 15명, 10명, 11명으로 2.4배 증가했고, 청주는 경쟁률이 15:1이나 되었다. 많은 사람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우익 단체 간부이거나 지역 유지였다.
그런데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제헌의회 선거는 미군정기에 UN 감시 하에 이루어졌으나, 제2대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치러졌다. 그럼에도 UN 한국위원회는 시찰반을 구성해 각 지방에 파견하여 공명선거 여부를 조사했다. 조사 방식은 후보자 한 명 한 명을 직접 면접하는 방식이었다.
청주에서는 중앙공원 안에 위치한 유아원에 면접 장소를 설치하고, 입후보자 전원에게 면접을 요청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광 충북도지사가 현장에 오기도 했다. 첫 번째 면접자는 홍원길이었다.
"귀하의 소속정당은 어디입니까?""무소속입니다."
"선거에 관권이 개입해서 부자유스럽지는 않습니까?""자유스럽습니다."
면접 내용이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그러나 UN한국위원회가 단순히 공명선거 감시를 위해 면접을 실시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후보들의 이력과 사상까지 확인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청주에서는 주성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에서 합동연설회가 개최되었다. 후보당 연설 시간은 20분으로, 15명의 후보가 연설하면 총 5시간이 소요되었다. 여기에 선거관리위원장 인사말과 사회자 발언을 합하면 총 6시간이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각 후보 진영에서 동원한 시민이었기에, 연설이 끝나면 유권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후순위 후보들은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정견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홍원길과 이영근의 독특한 선거전
▲ 의병대장 한봉수 출판기념회(청주공회당)
ⓒ 홍원길
제헌의회 선거에 이어 두 번째 출마한 홍원길(1914년생)은 독특한 선거전을 펼쳤다. 그는 충북신보에 연재했던 <의병대장>을 출판해 선거 홍보에 활용했다. <의병대장>은 한봉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로 1950년 3월 15일 출판되었으며, 해방 후 충북에서 청주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충북신보> 정경(政經)부장 나훈은 무심천 벚꽃나무에 <의병대장> 광고문을 걸어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선거 도중 소설 주인공 한봉수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홍원길은 이를 다른 후보 진영에서 사주한 것으로 여겼다.
홍원길의 선거운동은 정책 중심이었다. '특권계급 타도', '책임정치 구현' 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발 빠르게 움직여 현수막은 준비했지만, 각 투표소장 100미터 밖에 세울 수 있는 입간판은 준비하지 못했다.
당시 가가호호 방문은 불법이었는데, 홍원길을 제외한 모든 후보들이 이를 진행했다. 이러한 홍원길의 특색 있는 선거운동 덕분에 그는 15명의 후보 중 당선자 민영복에 이어 차점 득표자로 기록되었다.
청주 후보 중 가장 이색적인 후보는 이영근(1918년생)이었다. 그는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의 비서 출신으로, 근로인민당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반하여 청주중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전신)에 들어갔다.
진보정당 출신인 그는 청원을구 제헌국회의원 이만근의 친동생으로, 이만근은 동생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하자 자신의 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영근은 형의 선거구인 청원을구를 포기하고 청주에서 출마했다.
조봉암은 비서 출신인 이영근의 찬조연설을 위해 청주로 내려왔으나, 당시 대한국민당으로 출마한 이명식이 같은 당적의 조봉암에게 항의해 찬조연설은 무위로 돌아갔다. 뒤늦게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영근은 합동연설회에서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 토론식 연설로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홍원길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