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답변

주승용 부의장에게 항의하는 한국당 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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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승희 작성일19-12-11 06:23 조회1,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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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371회 국회(정기회) 제12차 본회의에서 주승용 부의장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 2019.12.10/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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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나눔 스토리] 아프리카 아이들 돕는 전위예술가 이건용 화백이건용 화백이 지난달 15일 서울 동교동 그로브 갤러리에서 캔버스를 잘라 만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그건 좀….” 이건용(78) 화백은 머뭇거렸다.

이 화백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예술가다. 국내외 유명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작품을 전시하게 해달라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작품이 팔리면 십일조와 함께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쓸 돈부터 떼어낸다. 지난달 12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만난 이 화백에게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선뜻 “그러고 싶다”고 답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이 화백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주저했다. 쑥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다. 아내 승연례 화백이 살짝 귀띔했다.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돈은 내도 가지는 말라고.”

이 화백은 목사의 아들이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동성교회를 개척한 이봉구 목사가 아버지다. 황해도에서 월남한 가난한 목사였다. 교회밖에 모르는 분이었다. 이 화백도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최우선으로 하고 십일조를 가장 먼저 떼어내야 한다고 배웠다. 십일조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40대 중반이던 1991년 군산대 교수였던 그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하다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 제가 죽기 전까지 교회 건축 50곳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이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월급쟁이 국립대 교수에게 그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부친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꼭 그렇게 해야겠니”라는 시큰둥한 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돈을 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꼭 자기가 가서 확인하고 싶고 참견하고 싶고 그러다가 주인 노릇까지 하려는 법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말이야. 너도 그럴 생각이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깜짝 놀란 이 화백은 “교회는 지어도 절대로 찾아가지는 않겠다”고 장담했다. 그렇게 하나님과 부친에게 약속은 했지만 오랫동안 50개는커녕 1곳도 제대로 세우질 못했다.

그는 20대에 프랑스에서 열린 비엔날레에 초대받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행위예술에 뛰어들어 캔버스를 뒤집어 톱으로 자르고 붓을 자신의 팔에 묶어 온몸으로 그림을 그렸다. 미술계의 관습과 군사정권의 감시에 저항하는 자신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검은 물감, 거친 붓으로 암울한 시대를 표현하고 푸르고 붉은색으로 희망을 그렸다. 이 화백의 주변에는 늘 경찰이 서성거렸고,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더 서러운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작품이 팔리기는커녕 공짜로 선물해도 오히려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동남아에 작은 교회 1곳을 세우는 데 필요하다는 1000만원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50개 건물을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갈 길이 까마득한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2007년 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반전은 그 뒤에 일어났다. 2013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인데요, 교수님 개인전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갈 때마다 ‘한 1년 동안 여기서 내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다. 진짜로 그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 사상 처음으로 6개월 동안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 중에 도록이 동이 나 다시 찍어야 할 정도로 화제였다. 뒤이어 해외 갤러리에 보낸 작품이 2억원에 팔렸다. 국내 미술계가 깜짝 놀랐다. 이 화백은 “하나님의 때가 다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과 한 약속부터 떠올렸다.

“이걸로 교회부터 지어야지.”

월드비전의 축하 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건용 화백. 송지수 인턴기자
그렇게 시작해 벌써 30곳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 건축헌금을 한 곳은 모두 가까운 동남아 나라였지만 아버지와 한 약속 때문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 선교사의 안내로 빈민가의 어린이를 만났다. 가슴이 아팠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고 펌프 설치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무렵 국민일보에서 월드비전 기사를 보게 됐다. 신촌성결교회가 아프리카 우물 사업을 위해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부부가 함께 서울 여의도 월드비전 본부를 찾아갔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유품으로 개척교회에 보낸 헌금 영수증이 여러 장 나왔던 게 기억나. 나도 당연히 바쳐야지. 한 번도 아깝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

이 화백은 요즘 아침마다 눈을 뜨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예전엔 나라에서 나더러 그림 그리지 말라고 고문까지 했는데, 이제는 세금을 많이 내니까 더 많이 그리라고 장려하더라고. 그러니 얼마나 좋아. 눈을 뜨면 그림 그리고 싶어서 혼자서 방방 뜬다고.”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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